루브르 박물관에서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기공되어 그의 사후 준공된 세계 최대의 개선문이다. 프랑스 역사의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는 50m이다. 개선문 바로 아래에는 무명 용사의 무덤이 있는데 사계절 등불이 꺼지지 않고 헌화가 시드는 일이 없다고 한다. 상젤리 거리 서쪽 샤를드골 광장에 위치해 있다.
개선문 지하도
샹제리제 거리(파리)
샹제리제 거리의 한쪽 끝은 콩코드 광장과 닿아 있고 한 쪽은 개선문이 있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가 여름에는 싱그럽고 가을에는 낙엽이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아름다운 시즌은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등 가로수에 전구를 달아 불을 밝힐 때다.
이 샹젤리제 거리는 일류 브랜드의 상점들이 몰려 있으며, 쇼윈도의 다양한 전시물 들이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귀족적인 거리이다. 거리 양쪽에 늘어선 건물은 그리 높은 것은 아니나 고풍스러운 석조 건축들이다. 이곳은 물건을 사기 보다는 쇼핑가를 둘러보는 관광객들을 붐비는 쇼핑거리이다.
오벨리스크(obeliskos 태양신을 섬기는 상징)
콩코드 광장의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 오벨리스크(크레오 파트라의 바늘)가 놓여져 있다. 기원전 126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현재 룩소르)의 람세르 신전에 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오벨리스크에는 프랑스로의 운송과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4년의 운송기간이 걸렸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 되었는데,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 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자금에는 약150만 프랑이 소요 되었으며 수명은 약40년이다. 복원으로 인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다 2m 가량 높아 지게 되었다고 한다.
콩코드 광장(파리)
파리 한 가운데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역사적인 콩고드 광장은 처음에는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다 1790년 대혁명이 있은 뒤 부터 '대혁명 광장'으로 불리었다. 이때 이곳에 있던 루이15세의 기마상을 없애고 단두대가 설치되어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혁명군 지도자였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1,119명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 2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있고 그 주변으로 프랑스의 8개도시를 상징하는 여인과 2개의 분수가 있다. 해마다 혁명기념일인 7월14일에 펼쳐지는 퍼레이드는 개선문에서 시작해 상젤리제 거리를 따라 내려와 이 광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기념일 전날인 13일 밤에는 이곳에서 화려한 불꽃 축제가 벌어지며 왈츠도 즐길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파리)
유럽3대 박물관으로 불리는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이민족들로 부터 시떼섬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12세기에 이르러서는 궁전으로 개축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인 1793년 처음 미술관으로 변모 되었다. 한편 지금과 같은 커다란 박물관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97년으로 1981년 부터 시작된 미테랑 대통령의 'Grand Louvre' 계획이 마무리 되면서 였다.
지금까지 30여만점 이상의 수집품이 전시되어 있는 루브르 박물관은 16 세기때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 티치아노, 라파엘로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미술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대 오리엔트 미술과 고대 이집트 미술, 로마 미술, 중세 르네상스 미술, 조각, 회화, 판화, 루브르 역사 등 8개의 컬렉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의 대표적인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Mona Lisa ',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Le Radeau de la Meduse','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La Cornation d`EmperesseJosephine' , '밀로의 비너스 La Venus de Milop'등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입구는 지상으로 솟은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이다. 지하로 내려가면 매표소가 곧바로 나온다. 박물관이 워낙 넓어 반드시 안내도를 받아 돌아 보는 것이 좋다.
밀로의 비너스 La Venus de Milo
밀로의 비너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를 묘사한 대리석 상으로, 길이는 203cm이다.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4월8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 섬의 농부 요르고스 켄트로타스에 의해 발견 되었다. 몇일후 프랑스 해군 장교 쥘뒤몽드위빌이 이 조각상의 중요성을 인식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마르키드리비에르를 설득해 조각상을 구입했다. 이 조각상은 1821년 루이 18세에게 헌납 되었으며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La Cornation d`EmperesseJosephine'
다비드는 1804년 2월 “제국 제일화가”인 공식화가로 임명되어 나폴레옹을 만나는 순간부터 열렬한 보나파르티스트가 되어 황제를 찬미하는 작품 몇점을 남겼다. 그중 하나인 이 대관식 장면은 1804년 12월 4일 노틀담 성당에서 거행된 행사이다. 그때 나폴레옹은 성당의 모든 장식을 화려하게 다시 치장을 시켰다. 그리고 이 그림은 그 다음해 제작을 시작하여 2년여의 준비와 1년여의 제작 과정을 걸쳐 1807년에 완성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대관식 날자를 8세기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마뉴 대제로부터 정확히 천년후로 잡았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하여 나폴레옹은 루이 16세의 후계자가 아닌 샤를르 마뉴의 계승자로 여기려 했던 것이다. 이 그림은 크기는 무려 가로 826cm 세로 979cm의 대작으로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당시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의 밀랍 인형을 만들고 거기에 옷을 입혀 그렸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그때 로마 교황 “비오 7세” 그에게서 황제의 관을 넘겨 받아 스스로 썼지만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장면을 그렸다. 권력은 타인에 힘이 아닌 스스로 쟁취하는 것 처럼 그려 나폴레옹의 정치적 야망을 잘 드러내어 환심을 사려한 것 같다. 화면 정면 커튼이 양쪽으로 내려진 별실에는 나폴레옹 어머니등 가족들이 있다. 이 장면은 나폴레옹의 부탁에 의해 참석하지 않았던 그들을 그려 넣은 것이다. 그리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 대사는 이 그림에서 제외 시켰다. 제단 뒤에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역사적 장면의 산 증인으로서 다비드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테오도르 제리코 (1791~1824) "메두사의 뗏목" Le Radeau de la Meduse'
낭만주의의 영향과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영향으로 웅대한 스케일의 역동적인 회화를 그렸던 제리코의 뛰어난 작품이다. 실제로 있었던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의 침몰 사건후 당시 뗏목으로 살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치밀한 인체의 포즈들과 절망 속에서 수평선 멀리 구조선이 오기를 기다리다 환호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파도와 뗏목의 흔들림 구름이 번지는 모습 근육의 다양한 표현은 작가의 치밀한 제작과정을 말해 준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1816년 워털루 패배이후 루이 18세가 복귀되고, 세네갈이 영국에 의해서 다시 프랑스 령으로 결정되고 프랑스는 7월17일 소함대 메두사호를 파견한다. 함장은 위그드르와 쇼마레였다. 그는 소위 구 체제에 속하는 장교로서 줄타기에 의해 임명 되었으며 경험 미숙으로 함장과 장교 선원들 사이도 좋지 못 했다. 모리타니에 앞 167km 지점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되자 좌초선의 부양은 쉽지 않았다. 메두사호는 과부화 상태였다.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웠던 것이다. 메두사호는 간신히 다시 부양했으나 곧 심각하게 파괴되고 만다. 탈출은 쉽지 않았다 함장 가족을 포함한 233명이 승객이 6개의 소형 보트와 대형보트 린치에 옮겨 탔다. 17명의 선원들은 메두사호에 그데로 남았다. 이들중 3명만 살아 남는다. 그러나 나머지 149명의 선원과 병사는 전장 20미터 폭7미터 짜리 작은 구명 뗏목에 식량도 거의 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다른 구명 보트와 연결되어 있던 줄이 끊어지자 (혹은 일부러 놓아 버렸는지는 알수 없음) 함장은 각자의 운명에 맏기도록 포기해 버린다. 상황은 급격히 악화된다. 첫 날밤 20명이 자살 하거나 살해된다. 12일이 지난후 같이 출발했던 작은 범선 아귀스호가 뗏목을 발견 했을 때는 15명이 살아 있었다. 아마도 인육을 먹고 버텄던것 같았다. 이들중 5명은 몇일후 숨졌다. 함장인 쇼마레는 3년형을 받았다. 주제 자체는 상당히 도발적인 선택이다. 사실적이며 거의 신문기사로 다루는 대 사건과 차이가 없다. 실제로 메두사호 사건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Mona Lisa (1503~1506년 포플러에 유화 53*77cm, 파리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또는 라조콘다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의 경칭이고 리자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모나리자의 다른 명칭인 라조콘다는 한국어로 조 콘도의 부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 작품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으로 스푸마토 깃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힌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미라미드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 보다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 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그림에는 황금 비율인 1:1.618의 비율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다. 코와 눈섭의 길이와 턱과 코의 길이의 비율 인중과 입술의 길이와 잎술과 턱의 길이의 비율 얼굴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등 황금비율이 많이 들어가 균형 잡힌 느낌을 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지오 바사리 말에 의하면 미 완성작으로 남겨 둔지 4년이 지난 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 했다고 한다.
모나리자 그림에는 눈섭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에 대해서는 눈섭을 뽑는 것이 당시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모델도 눈섭이 없는 상태였다는 주장과 모나리자 작품이 눈섭을 그리지 않는 미 완성 작이 라는 설이 있다. 모나리자를 연구한 엔지니어 파스칼 코트는 모나리자 눈섭이 청소중에 지워졌다며 모나리자 눈 주의를 자세히 살피면 미세한 금들을 볼수 있는데 이는 큐레이터나 그림 복원가가 눈 부위를 부주의 하게 닦았다는 증거로 볼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라파엘이 다비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그림에는 기둥이 있었지만 다빈치 그림에는 기둥이 없는 이유에 대해 액자 제작자가 그림을 액자 크기에 맞추기 위해 기둥 부분을 잘라 내버렸다는 주장도 제기 된다. 긴 생머리를 느려뜨린 현재 그림과는 달리 처음에는 머리를 묶은 모습을 그렸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또 한 그가 그린 그림에는 붓자국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1919년에는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만 붙인 L.H.O.O.O. 라는 작품을 그려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7년 8월에는 다비치가 그림 모나리자 초안이 공개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초안의 밑그림에는 원래 손이 포개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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