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일자 : 2021.8.3~8.1
속리산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차례로 법주사에 주석하며 수차례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다. 문종의 다섯째 아들인 도생승통은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원종 때 미수대사는 왕명으로 각종 경전 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공민왕이 직접 법주사에 와서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했다. 이때 사리를 모셨던 사리탑이 아직도 법주사 능인전 뒤쪽에 남아있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도 법주사에 들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대사를 도와 절을 크게 중창했다.
조선 중기에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지닌 대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후 1605년(선조 38년)부터 1626년(인조 4년)에 걸쳐 사명대사와 벽암각성 스님이 팔상전 등 전각을 중건했다. 1939년에 당시 주지였던 장석상 스님이 의뢰해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김복진이 법주사 미륵불상을 조성했으나 한때 중단되었다가 1964년 완공했다. 법주사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를 비롯, 다양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만 3점이고, 보물은 12점, 충북 유형문화재가 21점, 문화재자료 1점 등이다. 이외에도 법주사 자체가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 일원은 명승 제61호이다. 또한 천연기념물도 2점이 있다. 이 다양한 문화유산 가운데 법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 있다. 우리나라 수많은 탑 가운데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목탑으로 국보 제55호인 법주사 팔상전이다. 쌍봉사 대웅전과 두 기였지만 1984년에 쌍봉사 대웅전이 불타는 바람에 목탑으로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가 되었다. 팔상전 옆 사방이 트인 전각 안에 모셔진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도 법주사에만 조성되어 있는 보살상이다. 구원겁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할 것을 서원한 보살이 희견보살로 뜨거운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이 절에 있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목조 5층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을 비롯하여 동쪽 암벽에 새긴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및 절 어귀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은 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들이다. 또 경내에는 고려 충숙왕 1년(1341)에 세운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비롯한 수십 개의 비와 부도(浮屠)가 있고 높이 27m의 동양 최대의 거불이 1964년 6월에 점안식을 했다.
마지막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석옹이다. 현재 총지선원 왼쪽 40미터 지점에 묻혀 있는 항아리 형태의 석조물인데 문화재 전문가들도 용도에 대해서 알지 못하나 법주사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김칫독으로 사용했던 돌 항아리라고 한다. 또한 법주사 일원의 속리산은 대한민국의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철확
보은 법주사 철확(報恩 法住寺 鐵鑊)은 충청북도 보은군, 법주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유물이다. 2004년 8월 3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13호로 지정되었다.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법주사 철확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cm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cm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 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법주사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확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법회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입니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 이고, 법신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노사나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입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실내 안존불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입니다. 세 분 부처님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정신 즉 마음이 있고, 공부를 하면 지식이 있게 되는 즉 덕이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셋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가운데 부처님은 마음을, 왼쪽 부처님은 덕을, 그리고 오른쪽 부처님은 육신을 뜻한 것입니다. 이렇듯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모셔 놓은 것입니다.
사천왕석등
보물제15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 제작된 것으로 사천왕석등은 정형이라 할수 있는 8각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높이3.9m에 이르는 이석등은 지석대, 하대, 중대(간주), 상받침대, 상대(화사석),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상대의 각 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석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쌍사자석등
국보제5호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10척에 이르는 8각 석등으로 두마리 사자가 마주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이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고,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 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신라시대 석조예술품중 뛰어난 걸작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고 있다.
석연지
보은 법주사 석련지( 法住寺 石蓮池)는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 경내에 있는, 돌을 깎아 만든 조그만 연못이다.
국보 제64호로 신라 33대 성덕왕 19년(720)에 만들었다. 법당인 용화보전이 있을 때 정면에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 세계 연화지를 상징하며 화강암으로 조각하였다. 석조물 여기저기에 꽃·구름·덩굴 등의 무늬를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높이는 1.95m이다.
마애여래의상
보물 제 216호, 마애여래의상은 사리각 옆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발아래 지면에는 절반만 조각된 연화문 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전체 높이 6.18m, 연화대좌석 높이 2.84m, 평면 연화석 폭 2.27m
으름열매 (연복자) 학명 Akebia quinata DECNE
무더위와 소나기를 식혀줄 곳,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보다 더 좋아하는 곳 매표소입구 어린이용 물놀이 장소
정이품송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조선 세조 10년(1464년)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속리산연꽃단지에서
숙소였던 팬션에서 잘 가꾸어 놓은 참나리
원래 캠핑을 하기로 결정하고 떠났으나 캠핑장 도착 텐트를 다치고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 이동 물놀이한뒤 캠핑장으로 가는 시간에 국지성소나기를 만나 캠핑장 도착하여 확인하니 텐트가 빗물에 몹시 젖었다. 하이~고, 비는 그칠줄 모르고 날은 저물어 가는데.., 텐트에서는 잘 수 없을 것으로 판단 팬션을 알아 보던중 인심좋은 사장님을 만나 텐트대신 방콕으로 소나기를 피해 지낼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즐거워 하는 모습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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