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갤러리

인천 도호부청사와 향교

thinking photo 2018. 7. 6. 22:53










객사
객사는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 보다도 격이 높았으며 그런 만큼 관아 시설중에서 규모가 제일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객사는 신성한 건물로서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설계 되었는데, 가운데 채가 좌우 채보다 한단 높은 솟을 대문 형식의 톡특한 지붕이다. 전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가 전청이며, 부사가 정기적으로 예를 올리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다. 좌우의 익사는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이용되었다.






인천도호부청사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조직은 1413년(태종13년)에 전국을 8도로 나누었고, 도 밑에는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 등이 있었으며, 인천도호부 내에는 10개 면과 그 밑에 다수의 동. 리. 촌이 있었고, 동. 리 밑에는 매 5호를 한개의 통으로 하는 5가 작통제가 시행 되었다.  도호부는 중앙에서 파견된 도호부사 아래에 이.호.예.병.형.공의 6방을 두어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는데, 이를 담당하는 자는 지방의 향리였으며, 1485년 (성종16년) 경국대전에 규정된 당시 도호부 향리수는 26인이나 그 수는 점차 증가 하였다.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관할구역은 1748년(영조24년) 당시에는 강화.영종. 덕적도 등이 인천에 속했으며 인구는 2천6백여가구에 8천명이 거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헌
동헌은 부사의 집무실로서 객사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의 격식은 객사 보다 한단계 떨어졌으나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 합당 하겠끔 위엄을 느낄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으로 지방의 일반 행정 임무와 재판이 여기서 행해졌고, 좌우의 온돌방은 숙식 공간이라기 보다는 사무 공간이나 응접 공간이었다. 수령의 가족이 머무는 내아는 따로 배치 되었다.


도호부사의 임무
도호부사는 도호부의 모든 행정을 통괄하는 자로서 그 주된 임무는 수령칠사라 하여
첫째, 농사와 누에 치는 일을 잘 볼 것
둘째, 인구를 늘릴 것
셋째, 교육을 진흥시킬 것
넷째, 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다섯째, 부역을 균등히 할 것
여섯째, 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일곱째, 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


지방수령의 공통임무에 속해 있으며 지방관의 치적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 되었다. 또한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는 등 군사지휘권도 장악하고 있었다.